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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치, 외교, 국방
 KOTOCH  | 2006·12·27 18:25 | HIT : 3,222 | VOTE : 801
법체제


전전의 일본의 국가체제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는 공식적인 선언에 의해 천황이 바로 정치·권력 조직의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전후 천황은 헌법이 규정하는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기능을 갖지 않는 상징적인 지위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의 국가체제는 기본적으로는 현재의 헌법(1946 제정)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선 역사적인 배경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전의 정치적인 제도는 거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으므로, 1889년(明治 22)에 성립된 대일본제국헌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전의 이 메이지 헌법은 대체로 독일·프로이센의 헌법을 모방했으며 그후 영국의 헌법을 모델로 했다. 패전과 더불어 탄생한 일본국헌법은 미합중국헌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특징이다. 헌법체제의 골격 자체는 오히려 구미 선진국의 그것에 준거하여 그들과 공통된 것을 채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다. 즉 메이지 헌법은 천황의 이름으로 신민(臣民)들에게 내린 흠정(欽定)헌법이다. 이와 동시에 황위계승·즉위·황족 등에 관한 황실전범도 공포되었다. 이를테면 메이지 헌법은 서로 모순된 구미 선진국과 일본이라는 두 혼(魂)의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


1946년 공포된 일본국헌법은 그 제정과정에서 점령군이 차지한 역할이 크다.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의 개정이라는 형식을 취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신헌법이다. 그것은 구헌법의 기축이 천황에게 있었던 데 반해 국민주권을 취한 데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징적으로 천황제를 존속시킨다는 점에서 구헌법 정신과 타협한 산물이라는 면도 있으나 민주주의적인 원칙에 충실한 정치이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정치기구


일본국헌법에 따르면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나 그 권력은 대표자에 의해 행사하는 형식(대표민주제)을 취한다. 따라서 국민대표기관인 국회가 정치기구상 '최고기관'의 지위를 차지한다. 국회는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으로 구성되는데 둘 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의원으로 조직된다. 국회는 법률 제정, 예산 의결, 조약 승인 등 정치운용의 근거가 되는 국가행위를 담당하는데 그 결정에는 보통 양원의 가결이 필요하다. 내각은 국회가 승인한 법률과 예산에 입각하여 정치·행정을 실제로 행하는 기관이다. 내각은 국회의원의 호선에 의해 지명된 자가 취임하는 내각총리대신 및 내각총리대신이 임명하는 국무대신으로 구성되는 합의체이다. 헌법에는 국무대신 가운데 과반수는 국회의원 중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운용에서 국회의원이 대신에 임명되는 것은 극히 드물고, 국회의원이라해도 압도적 다수는 중의원 의원이다. 사법권을 담당하는 것은 최고재판소 및 법률에서 정해진 하급재판소이다. 최고재판소의 재판관은 내각이 임명하고 그 장관은 내각의 지명에 따라 천황이 임명한다. 하급재판소의 재판관은 최고재판소가 지명한 명부에 의해 내각이 임명한다.



정당


헌법이 취하는 의회주의가 정당을 축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일본은 틀림없이 정당정치를 하는 국가이다. 다만 전후의 짧은 한 시기를 제외하고 보수정당, 특히 1955~93년의 약 40년간 자유민주당이 정권을 독점해 온 것이 특징이다. 집권 그룹인 자민당과 관료들이 일체가 되어 독특한 '권력공유 시스템'을 형성함으로써 정권교체를 더욱 어렵게 했다. 그러나 1993년 7월 18일 조기에 실시된 총선에서 자민당은 223석을 얻어 과반수 의석(256석)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재집권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7개 군소정당은 연합하여 263석을 확보함으로써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1993년 8월 23일 비자민 7개 연합 정당 중 일본신당의 대표적인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총리직에 취임했다. 1994년 6월 29일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총리직에 선출됨으로써 1948년 이후 47년만에 사회당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전후의 정치과정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 수락을 발표한 스즈키[鈴木] 내각이 총사퇴하고 히가시쿠니[東久邇] 내각을 성립하여 패전처리에 임했다. 1947년 새 헌법하에 총선거로 사회당이 제1당이 되었다. 사회당이 주도하는 가타야마[片山] 내각이 성립되었고 아시다[芦田] 내각에 이어 1948년 10월 요시다[吉田] 내각이 성립되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었고 점령체제는 안보체제로 바뀌었다. 1954년 조선의옥사건(造船疑獄事件)이 원인이 되어 요시다는 7년 동안의 총리 자리를 내놓았다. 그 뒤를 하토야마[鳩山] 내각이 이었다. 그즈음 일본 최대 대외과제였던 구소련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일소 공동선언이 조인되었다. 그 뒤 기시[岸] 내각은 경제외교를 전개하고 헌법개정과 미일안보조약개정을 정치과제로 삼았다. 1960년 6월 19일 항의하는 시민 30여 만 명이 국회주변에서 연좌 데모를 하는 가운데 참의원의 의결을 거치지 않은 채 신안보조약이 성립되었다. 극비리에 비준절차를 마친 23일 기시 내각은 총사퇴했다. 그 뒤를 이어 이케다[池田] 내각이 '경제시대'를 열었다. 그결과 일본은 국제통화기금(IMF) 8개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 개통, 도쿄 올림픽 대회 개최(1964) 등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케다의 뒤를 이은 사토[佐藤] 내각은 오키나와[沖繩]반환과 한일국교정상화를 중요과제의 하나로 삼아 이를 실현했으나 고도성장의 대가로 섬유부문에서 미일무역마찰을 겪여야만 했다. 결국 일본은 2차례의 닉슨 쇼크를 경험했고 사토는 1972년 5월 오키나와 복귀기념식전을 마치고 은퇴했다. 대중의 인기 아래 1972년 7월 성립된 다나카[田中] 내각은 중국과의 국교회복을 최대 목표로 삼고, 그해 9월 중일공동성명에 조인함으로써 전후 27년 만에 중국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개선했다. 그러나 물가 폭등, 유류파동,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다나카 내각은 무너졌다. 1974년 12월 성립된 미키[三木] 내각 집권기에는 경제성장이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당내 투쟁으로 사직한 미키를 이어 1976년 12월 후쿠다[福田] 내각이 성립했으며 중일 평화우호조약이 조인되었다. 1978년 12월 출범한 오히라[大平] 내각은 미일경제마찰·방위 문제 등으로 진통을 겪었다. 1980년 7월 성립된 스즈키 내각은 재정 재건, 행정개혁을 최대 현안으로 내세웠으나 정책상의 난항으로 퇴진했다. 1982년 11월 성립된 나카소네[中曾根] 내각은 미일군사협력 강화를 다짐하는 적극적인 외교로 '경제대국'에서 '정치대국'을 지향했다. 1983년 국회의원의 전국구제가 폐지되고 참의원 의원선거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나카소네 내각은 세제개혁, 방위비 증강, 교육개혁과 같은 현안 사항에 착수하려 했으나 격렬한 반대여론에 부딪쳐 폐기하고 말았다. 나카소네 내각을 이어 1987년 11월 다케시타[竹下登]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다케시타 내각은 이듬해에 발생한 전후 최대의 정치 스캔들인 리쿠르트 사건에 휩쓸려 1년 반 만에 무너졌다. 자민당 일부 유력자들의 파벌차원에서의 담합에 의해 1989년 6월에 등장한 우노[宇野] 내각은 총리 자신의 '기생 스캔들' 관련과 참의원 선거에서의 자민당 참패로 취임 52일 만에 물러났다. 이어 등장한 가이후[海部] 내각의 탄생 과정도 자민당 특유의 구태의연한 파벌담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정치사에서 1년 사이 내각이 3번 바뀌는 드문 기록을 세웠다. 자기 파벌을 갖지 못한 가이후 약체내각은 정치개혁법안 처리의 실패로 퇴진하고 1991년 11월 미야자와[宮澤] 내각이 출범했다. 자민당 내에서 파벌 순위 3위인 미야자와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당내 최대파벌인 다케시타 파의 지지로 가능했던 것으로, 스스로 '보수본류정권'이라 자처한 바 있다. 미야자와 내각은 출범 직후 난항을 거듭한 끝에 국제연합(UN) 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안을 처리하여 일본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의회 내에 개혁입법을 도입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로 인해 자민당 핵심 의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1993년 6월 일부 자민당 의원들까지 가세해 내각 불신임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미야자와 내각은 붕괴하게 되었다. 이어 7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자민당은 야당 연합에게 의회 내 과반수 의석을 내어줌으로써 38년의 장기집권 시대를 마감했다.


1993년 7월에 치러진 총선으로 일본의 정치적 변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일본신당과 일본신생당을 포함해 몇몇 신당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본질적으로는 민자당에서 떨어져 나온 분파로서 기존 야당들과 연대해 일본신당 당수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한 연정을 구성했다. 호소카와 총리는 총선에서 드러난 일본 국민들의 정치개혁 열망을 받아들여 일련의 개혁 정치를 실시했다. 기부금을 제한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1개 선거구에서 의원 5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300개의 1인 소선거구제로 개혁하는 내용의 선거법 일괄수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의 연정 내에서 세제 개혁에 대한 반대가 심했고 개인적으로도 미야자와 정부 집권 기간중에 있었던 스캔들 관련 혐의로 기소되어 1994년 4월 사임했다. 호소카와의 승계자는 2개월만에 실각했고, 권력 공백기에 사회당과 잔여 자민당 의원들이 연합해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내세움으로써 1948년 이래 처음으로 사회당 정권이 탄생했다.



대외관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피점령국이 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고 어떻게든 독립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1952년 4월 28일 연합국가들의 비준을 얻고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이 발효된 시점부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교관계를 처리하는 지위를 어느 정도 회복했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시발점에서부터 일본의 외교 및 방위는 미국에 대해 종속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일본은 대미외교와 모순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전방위 외교', '등거리 외교'를 취해야만 했다. 일본은 1956년 UN에 가입한 후 UN 중심주의를 외교원칙의 하나로 삼아왔다.

중국과의 관계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2개의 중국' 중 타이완(중화민국 정부)을 선택하고 본토인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을 배제함으로써 성립되었다. 1950년대에는 중일 쌍방의 민간무역단체에 의해 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거듭 갱신하는 방식으로 평화공존원칙에 입각한 중일 정상화의 길이 모색되었다. 1958년 타이완파인 기시가 총리로 있을 때 중일관계가 전면 중단되는 사태가 있었으나 1962년 중일무역에 관한 각서가 체결되자 정경분리원칙 아래 교류가 재개되었으며 국교회복을 원하는 요구가 높아졌다. 1971년 7월 15일 닉슨의 중국방문계획이 발표되고 이듬해 2월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일본 정부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9월 다나카 총리는 저우민라이[周恩來]와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양국의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1978년 8월 일본은 중국과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조인했다. 그 이후 중국과의 무역 및 문화 교류가 급격히 증대되어 1990년대초에는 중국이 미국 다음으로 큰 교역대상국이 되었다. 전쟁중에 일본군이 중국인들에게 끼친 "다대한 고난"에 대한 암묵적인 사과 발언이 있었던 1992년 아키히토[明仁] 일본 왕의 중국 방문은 일본이 중국과 경제적인 유대뿐만 아니라 전쟁에 기인한 서로의 간극을 뛰어넘고 문화적인 유대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러시아와의 관계


1953년 소련 마렌코프 총리의 일소관계 정상화 필요성 시사를 계기로 급속히 그 기운이 고조되어 1955년 6월 런던에서 양국간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여름 하토야마 총리가 구소련을 방문하여 '아데나워 방식'(영토문제는 제외하고 국교를 회복하는 방법)을 적용해 일소공동선언에 합의를 보았다. 일본인 포로, 북양어업, UN 가입 등 양국간의 많은 현안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영토귀속문제였다. 이보다 앞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강화 참가 가능성을 예견하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는 일본에게 쿠릴 열도를 사할린 및 그 주변의 섬들과 함께 포기하게 했다. 하보마이 제도[齒舞諸島], 시코탄 섬[色丹島] 등의 일본귀속문제를 놓고 미국과 소련은 그 태도에 일관성이 없어 이에 관한한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1960년에 들어와 일본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게 되자 자원 수입과 기술 협력이라는 양쪽의 이해관계에 의해 경제면에서 일소관계가 긴밀해졌다. 그러나 1970년대말부터 동서관계가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1979년 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동지역에의 보조강화 등 군사·외교 면의 경직화가 두드러지면서 미국은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일본은 미국과 방위체제를 서로 협력하는 동맹관계에 서게 됨으로써 소련은 잠재적인 적국이 되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옐친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러시아와의 관계로 과거의 긴장상태가 해소되었으나 그렇다고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비해 긴밀도가 두드러진 것도 아니다. 즉 대러시아 경제원조도 다른 서방국가의 수준과 비슷하거나 소극적인데, 이는 여전히 북방영토문제 해결에 확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계


일본의 외교정책은 이제까지 대미관계를 축으로 해서 전개되어 왔다. 1950년대까지는 거의 미국의 일방적인 주도하에 형성된 것이었다. 일본은 그 아래서 전후 부흥, 경제 발전, UN 가입 등을 실현했고 1960년대에 고도성장기를 맞게 된다. 1960년대에는 오키나와 반환문제와 일본경제자유화가 대두되었다. 1965년 대미무역이 흑자로 전환되면서 그 수출 품목도 철강·텔레비전·자동차로 바뀌고 미국시장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1969년 섬유수출자유규제를 둘러싼 미일분쟁이 계속된 데 이어 1970년대에는 자동차·전자산업 등 공업전반, 서비스업, 농업 등으로 그 분쟁의 폭이 확대되었다. 1970년대초 닉슨 쇼크, 1971년 닉슨의 신경제정책 발표로 일본정부는 비로소 미일 간의 거리를 통감했고 1973년의 유류파동을 계기로 아랍을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여 중동경제원조에 역점을 둠으로써 다원적인 외교로 전환하게 되었다. 일본외교의 다원화 현상은 40년 동안의 본질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으나 예상 이상으로 무난히 유류파동을 넘기고 안전성장을 착실히 이룩하여, 일본은 아시아·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의 경제원조의 양적 확대와 질적 전환을 기대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냉전 종식 후 세계의 정치판도가 급속히 변화했지만 양국 관계에 대한 서로의 근본신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양국은 여전히 상호 방위조약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게 되며 일본 내의 수천 명의 미군이 주둔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미국은 일본 방위력의 증강을 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핵우산'과 같은 미국의 대전략체계 속에 일본자위체제가 포함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한다. 일본 경제가 성숙하고 일본의 국제적 역할이 증대되면서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무역 마찰이 심각한데, 미국은 일본경제의 자주화를 요구하면서도 미국 시장에 일본상품의 자유로운 유입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또한 서로가 제시하는 해결책들을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데서 갈등이 더 증폭되고 있다.



국방


일본은 패전시 항복의 조건으로 육해공군을 해체시켰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의 발발과 함께 점령당국의 명령으로 일본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경찰예비대를 설치했다. 이는 1952년 보안대로 재편되었다가 1954년 현재의 자위대가 되었다. 일본의 자위대는 육상·해상·항공의 셋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18만 명, 4만 5,000명, 4만 7,000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두 최신 무기로 무장되어 있고 군사비는 1988년 현재 미국, 소련에 이어 세계 3위이다. 1985년 일본 정부는 중기(中期) 방위력 정비계획을 결정하고 1986년부터 향후 5년 동안 본토방공과 항로방위의 능력 향상, 정보·정찰 능력 향상, 기술·연구 개발 추진, 방위력의 효율화·합리화 등을 역점으로 하여 방위력을 정비하기로 했다. 이 계획의 총경비는 약 18조 4,000억 엔으로 이는 1976년의 각의 결정인 '방위비는 GNP의 1%를 넘지 않는다'는 방침에 어긋난다.


현대의 자위대는 전전의 군대와는 달리 어떠한 의미로도 스스로 특유한 법체제를 갖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군법회의와 같은 특별재판소도 성립할 여지가 없다. 또 다른 특징은 자위대가 미국의 방위전략의 일환으로 이와 유기적인 결합을 하여 존재한다는 점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자위대의 두드러진 활동양상은 해외파견이다. 즉 해상자위대는 1991년 4월 이라크에 의해 걸프 만에 부설된 기뢰들을 제거하기 위해 6척의 소해함(掃海艦)을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했다. 이들은 고난도의 기뢰처리작업을 마치고 6개월 만에 철수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1992년 6월 자위대의 UN 평화유지활동(PKO) 참여와 자위대의 재외파견 임무를 해외까지 확대하기 위해 국제평화협력법과 국제긴급원조대파견법(개정법)을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1992년 10월 육상 자위대의 시설과 부대가 캄보디아에 파견되어 UN 캄보디아 잠정기구 산하에서 활동을 개시해 이듬해 9월까지 1년간 UN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했다. 1993년 4월 내각은 자위대의 제2차 UN 평화유지활동을 승인했고, 5월 파견부대가 모잠비크의 마푸토를 향해 출발해 그곳의 총선이 열릴 때까지 주둔하게 되었다. 한편 국제긴급원조대는 최대 770명을 파견할 수 있도록 병력과 장비를 대기시키고 있으며 파견지역은 아시아, 태평양의 개발도상국으로 설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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